6. 박해의 원인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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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해의 원인과 의미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로 불릴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었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였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구실까지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지켜나가는 일이 집권층에게 맡겨진 가장 큰 임무였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은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집권층에서 그와 같은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부인하며 새로운 가르침을 펴나가고 있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되던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회의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상 제사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유학자들이 제사를 강조했던 까닭은 제사가 조상에 대한 효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양반 중심의 정치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효자들을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천주교회는 조상 제사를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여 그 가치를 부정하였다. 천주교회는 양반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신앙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적 유교 가치의 보존과 양반의 정치적 특권 유지를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이고, 양심법이 실정법보다 더 존귀하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와 양심이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왔던 동양 문화의 전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당시 사회에는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한 후 그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여, 조정의 명령 없이도 신자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리의 부패가 교회의 탄압을 가중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또한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로부터 박해를 당하였다.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나 사상범 또는 풍속사범으로 처벌되었으므로, 그러한 ‘범죄자’가 자기 집안에 생겨날 경우 가문 전체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박해가 더욱 심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과 토호들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산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민중 봉기를 일으키거나 도적떼가 되었던 사회 불안으로 인해, 신자들이 민중 봉기에 동조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집권층에게 천주교회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천주교회 박해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교회에도 있다. 16세기의 중국 선교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인색하였다. 동양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간주하였고, 교회의 이러한 판단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따라서 조상 제사의 금지를 비롯 당시 교회 당국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26일 “조국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에 관하여” 일본 주재 교황 사절에게 보내는 포교성성 훈령으로 신사 참배를 허락하고, 또 1939년 12월 8일의 “중국 예식의 일부 의례와 서약에 관한” 포교성성 훈령으로 조상 제사를 허락하였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서로 얽혀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으며,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이 교회사에 큰 박해로 나타나고 있다. 100여 년 동안 줄곧 이어진 박해의 과정에서 1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행위였다. 그들의 순교는 또한 조선 왕조의 엄격한 사상 통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순교자들의 죽음은 단순히 신앙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도 의미를 던져주는 사회적 역사적 행위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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