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자들의 신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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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자들의 신심생활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탄압을 각오하면서 신앙을 실천하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 갔다. 이러한 신앙 실천과 신심 생활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교회 서적에 대한 독서였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창설 직후부터 일반 민중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서를 번역해 나갔다. 교리서의 번역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은 최창현이었다. 중인 출신인 그는 일반 신자들을 위하여 한문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번역한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주일과 축일에 읽는 성서를 간추려놓은 「성경직해」를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교회에서는 「성교일과」, 「천주성교공과」를 비롯한 여러 기도서들이 번역되어 기도 생활의 바탕이 되었다.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는 「성녀 아가다」, 「성녀 빅토리아」와 같은 로마 시대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신앙을 증거할 용기를 길러갔으며, 「성녀 데레사」와 같은 성인전을 통하여 신앙의 열정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신자들은 여러 종류의 묵상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지충을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의 기록을 소중히 간직하여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 루갈다의 애절한 편지를 필사하여 서로 돌려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특별히 성모, 예수 성심, 순교자 등에 관한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은 박해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었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박해 시대 교우들은 미사에 참여하기가 극히 어려웠지만, 주일과 대축일이면 반드시 신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공소 예절과 같은 전례 생활에 참여하였다. 비밀리에 열리는 그러한 공동 집회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각오하여야 했으나, 여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숫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해 갔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충청도 배론, 경상도 신나무골 등은 대표적인 교우촌이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일부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생활해 나갔으며, 상당수의 신자들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살면서 은밀히 신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교회 창설 초기부터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세례를 받고 서로 한 형제가 된 신앙 공동체 안에는 결코 반상의 차별이 없었다. 상민, 노비, 백정들이 양반과 함께 서로를 신앙의 벗[敎友]이라고 부르며 평등하게 지냈다. 일부 신자들은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기도 하고, 부유한 신자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희생하기도 하며, 모두가 자신의 신앙에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사랑의 실천자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증인이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지니고, 자신이 터득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과 나누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진리의 탐구자였다. 그들 또한 평범한 인간들로서 죽음의 어려움에 고뇌하기도 하였다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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