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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천주교회사

    4.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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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우이성당2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74회   작성일Date 22-12-2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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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교회가 1784년에 세워진 이후 1800년에 대략 1만 여 명에 달한 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던 힘없는 사람들이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여성들이 많았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초기에, 교회는 집권층의 탄압을 받았다. 1801년의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등 지도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사형을 면한 일부 신자들은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박해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조선 왕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서양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이 편지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에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이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 재건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정하상 등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로마 교황청에까지 편지를 보내어 주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고, 드디어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북경교구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교황청은 조선 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으나, 1836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으나, 1839년의 박해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했던 정하상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으로 인해, 이제부터 조정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나갔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김대건, 최양업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으며, 최양업 신부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사목 활동에 적극 투신하다 병사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의 내용을 쉽게 알려주고 묵상에 도움이 되도록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1860년대 초 거듭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866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병인대박해로 인해 8,000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당시의 박해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발생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79위 순교자는 1925년에 시복되었고, 1866년의 박해 중에 순교한 24위 순교자는 1968년에 시복되었으며, 이들 한국 순교 성인 103위는 198456일 서울에서 시성되었다. 한편 이벽을 비롯한 한국 교회 창립 선조들과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시복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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